만약 누군가 저에게 가장 철학적인 질문을 남겼던 애니메이션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코드기어스>를 떠올릴 겁니다. <코드기어스>는 황제국인 브리타니아가 일본(Area 11이라고 불림)을 식민지로 지배한 세계에서, 왕자 출신인 망명자 를루슈가 몰래 정체를 숨기고 제로라는 가면을 쓴 채로 혁명을 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는 “힘이 정의를 만든다”는 제국 브리타니아의 이데올로기와, “정의가 힘을 이끌어야 한다”는 를루슈의 사상이 부딪히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도덕적 난제를 끝없이 시청자에게 던집니다.
1. 지배와 피지배: 식민주의
브리타니아의 계급주의와 우월주의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일본 명칭의 번호화입니다. 일본을 Area 11이라 부르며 일본인을 일레븐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전적인 식민지 통치 기술로 차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 속 “폭력의 일상화”를 보여줍니다. 비록 를루슈의 복수는 개인적인 상처에서 출발하지만, 자신의 복수를 식민지를 지배하는 권력의 억압을 ‘악’으로 선포하며 집단적인 해방으로 포장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작품 속 윤리적인 불편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방을 외치며 통치 기술을 복제하는 혁명 지도자의 모순이 이러한 방식이 괜찮은건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2. 기어스: 관계 속 권력
르룰슈의 기어스는 단순하게 보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초능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어스는 결국 “명령에 대한 절대복종”을 시키기 때문에 이는 물리적 폭력보다도 관계 속에서의 비대칭을 상징합니다. 특히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어나게 되는 명령 사고는 개인의 의지와 진술이 어긋나게 되는 공포감을 느끼게 해주면서, 를루슈가 이후 결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심리 방어 기제를 강화하게 된 계기로 볼 수 있습니다.
3. 두 영웅의 대립 구도
두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루룰슈와 스자쿠의 혁명에 대한 생각 차이가 극명하여 이 또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모두가 이 두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 무조건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를루슈(체제 외부로부터의 변혁)와 스자쿠(체제 내부로부터의 개선)는 고전적인 개혁과 혁명의 대립 구도를 드러냅니다.
- 스자쿠: 제도 안에서부터의 개혁은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체제의 설계 자체가 결국 개혁자를 흡수합니다.
- 르룰슈: 체제를 무너뜨리는 전복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결국 폭력의 통제가 어렵습니다.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결국 정답이 아니라 끝없는 딜레마의 지속성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말에 나오는 제로 레퀴엠은 비극적인 타협점이자,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공선의 신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보입니다.
4. 가면과 이름, ‘제로’
아무래도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얼굴을 가린 를루슈는 자신의 책임을 분산시키게 됩니다. 제로라는 이름 또한 르룰슈 개인을 지우고 제로라는 하나의 상징을 남기는 장치입니다. 상징이란 것은 사람들의 시선과 주목을 모으지만 이와 동시에 소모시키기도 합니다. 동생 나나리라는 존재는 를루슈가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시키는 정서적인 면허로 작용합니다. 그에 반해 동료 C.C. 는 끝없는 영속성과 죄책감의 기억과 감정을 제공하며, 영웅이 결국 죽어야 완성된다는 냉혹하고 차가운 진실을 보여줍니다.
5. 메카 액션과 전략극
코드기어스는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메카 배틀 장면이 싸움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만큼 메카 배틀을 전략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사용하게 됩니다. 종종 나오는 체스, 배틀 중 포위와 기만행위 등 모든 전술들은 정치적 은유로 보입니다. 시즌 1에서는 내적인 동기와 도덕적인 추락을 보여주며, 시즌 2에서는 세계 정치의 모습, 이데올로기의 확장까지도 보여주며 시청자로 하여금 생각의 규모를 키웁니다. 이렇게 액션 및 전략물 장르들이 적절히 섞여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6. 결과주의의 비극
시즌이 거듭될수록 를루슈의 심리 변화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혁명을 일으키며 르룰슈의 정당화로 인하여 그의 심정은 동기→결과→신화로 이어집니다.
- 초반기: “동기는 정당하다.”
- 중반기: “만약 결과가 좋다면 수단은 정당하다.”
- 후반기: “결과를 위해서 내가 악이 되겠다.”
결과주의를 따르던 를루슈의 중반기 행동과는 달리 결국 작품은 결과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반기로 갈 수록 결과주의가 남긴 비극과 비용을 르룰슈 자신의 희생으로 보여주면서, 폭력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7. 를루슈와 C.C.: 사랑이 아닌 계약
아무래도 코드기어스의 팬이라면 를루슈와 C.C. 의 사이가 잘 이어지기를 바랄텐데요,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코드기어스에서의 르룰슈와 C.C.의 관계는 전형적인 로맨스 관계가 아니라 계약으로 이어진 동료 관계입니다. 불멸의 존재인 C.C. 과 끝의 결말을 보여주는 를루슈와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서 “끝낼 수 있기에 선택이 윤리가 된다”는 메시지가 강화됩니다.
8. 희생양의 반복
최종적으로 를루슈의 최후는 제로라는 개인에게 악을 집중시켜서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이는 공동체 사회를 정화하는 희생양 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직 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던 몇몇만 결국 그동안 그의 선택과 언행의 의미를 알아차릴 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절대적 악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결말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도, 과연 공동체가 다시 악의 존재를 반복시키지 않을지 질문을 남깁니다.
9. 결론: 질문을 남기는 비극
코드기어스는 정의란 무엇인지, 정당화는 어디까지 괜찮은 것인지, 권력의 행사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라는 무거운 주제를 애니메이션 스토리로 풀어내며, 시청자에게 끊임없이 도덕적 질문을 던집니다.
- 혁명은 언제부터 악을 닮게 되는가?
- 정당화의 끝은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 영웅의 죽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면 결국은 연기하는 것뿐인가?
결국 이 작품은 “악을 끌어안음으로써 세계가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결말의 장엄함은 슬프지만 비극의 무게에서 오며, 진짜 우리 삶 속에서의 결말은 화면 밖인, 우리의 정치적, 윤리적 선택 속에서 계속될 것을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