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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과 인문학

마루밑 아리에티 애니메이션이 던지는 정체성의 질문

by 찰콩쓰 2025. 9. 8.

정체성 관련 일러스트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마루밑 아리에티는 작고 아기자기한 판타지 세계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작은 소녀의 모험담이 아니라 훨씬 깊은 철학적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현대사회에 들어설수록 더욱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주제,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질문입니다.

작은 몸집으로 인간 세계 아래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아리에티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됩니다. 이 질문은 단지 그녀의 고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아가며 부딪히는 철학적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마루밑 아리에티 속 장면들을 바탕으로 정체성과 소속감이라는 문제를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

아리에티는 마루밑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늘 숨어 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발각되는 순간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에, 그녀의 삶은 늘 긴장과 제한 속에서 이어집니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타자(他者)의 시선 속에서 규정되는 자아와 연결됩니다. 인간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아리에티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숨고,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 사회 속에서 소수자나 약자 집단이 겪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몇 번씩 이러한 위치에 서곤 합니다. 어떤 무리 속에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때도 있지만 또 다른 어떤 무리에 가면 약자가 되기도 합니다. 나답게 살고 싶지만, 타인의 시선과 규범 때문에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정체성의 불안과 선택

아리에티는 호기심 많고 용감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큽니다. 그녀는 인간과 교류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로 인해 자신의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의 불안(identity crisis)입니다. 나는 단지 숨어 살아야 하는 작은 존재일 뿐인지, 아니면 더 넓은 세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존재인지 아리에티는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청소년기의 가장 큰 과제가 바로 정체성의 확립이라고 했습니다. 아리에티가 겪는 갈등은 우리 모두가 청소년 시기 또는 인생의 전환기에 겪는 본질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습니다.

소속감과 타자와의 만남

정체성은 단순히 나는 누구인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입니다. 아리에티는 자신이 속한 가족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지만, 동시에 인간 소년 쇼와의 만남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와 연결됩니다.

이 과정은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와의 만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타자는 나와 다른 존재이지만, 그 만남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합니다. 아리에티가 쇼와 교류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확장되는 경험입니다. 그녀는 숨는 존재에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갑니다.

우리 역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재정립합니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해 가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소속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별이 남긴 답

영화의 결말에서 아리에티 가족은 결국 떠나고, 쇼와 아리에티는 짧지만 깊은 관계를 뒤로한 채 이별합니다. 이별은 아리에티에게 슬픔을 남겼지만, 동시에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쇼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확장, 즉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은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마무리

마루밑 아리에티는 작은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합니다.

아리에티가 찾은 답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분명 성장과 변화를 향한 한 걸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불안과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교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확실한 나를 발견합니다. 물론 정체성의 질문이란 끝나지 않는 여정일테지만, 아리에티처럼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성장의 증거일지도 모릅니다.